노후 준비를 이야기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은퇴할 때 얼마가 있어야 할까?”입니다. 1억원이면 될지, 3억원은 있어야 할지, 국민연금까지 합하면 생활이 가능할지 계산하게 됩니다. 저 역시 노후자금은 많이 모아두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은퇴 이후에는 생각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모아놓은 돈을 어떤 순서와 방법으로 꺼내 쓰느냐입니다. 같은 1억원으로 은퇴생활을 시작하더라도 인출 방법에 따라 노후에 실제 사용할 수 있는 돈의 차이가 수천만원까지 벌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돈을 모을 때만 재테크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매달 월급이 사라지는 은퇴 이후부터는 ‘인출의 기술’이 더욱 중요해질 수 있습니다.
1억원을 똑같이 가지고 있어도 결과가 달라지는 이유
직장에 다닐 때는 투자한 주식이나 펀드가 떨어져도 기다릴 수 있습니다. 다음 달에도 월급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은퇴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매달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가지고 있는 자산을 조금씩 꺼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은퇴할 때 1억원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한 사람은 필요한 생활비가 생길 때마다 투자자산을 팔고, 다른 사람은 1~2년 정도 사용할 생활비를 현금성 자산으로 따로 마련해두었다고 해보겠습니다.
주식시장이 상승할 때는 두 사람의 차이가 크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은퇴 직후 주가가 크게 떨어졌을 때입니다.
생활비가 없는 사람은 손실이 난 주식이나 펀드를 팔아야 할 수 있습니다. 1,000만원이던 투자자산이 700만원으로 떨어진 상태에서 매도하면 손실이 그대로 확정됩니다. 이후 시장이 회복되더라도 이미 팔아버린 자산에서는 회복 수익을 얻을 수 없습니다.
반면 생활비를 별도로 마련해둔 사람은 시장이 좋지 않을 때 투자자산을 당장 팔지 않고 기다릴 여유가 생깁니다. 이런 차이가 여러 해 반복되면 처음에는 똑같았던 노후자금의 수명이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은퇴자산 관리에서는 이를 ‘수익률 순서 위험’이라고 합니다. 평균수익률만 보는 것이 아니라 언제 수익이 나고 언제 손실이 발생했느냐가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은퇴 후에는 생활비 통장을 따로 준비해보세요
그래서 은퇴 이후에는 모든 돈을 한 계좌에서 관리하기보다는 당장 사용할 돈과 나중에 사용할 돈을 구분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달 생활비가 200만원이라면 1년 생활비는 2,400만원입니다. 일정 기간 필요한 생활비를 예금이나 현금성 자산으로 확보하고, 당장 사용할 필요가 없는 돈은 투자자산으로 유지하는 방식입니다.
물론 누구에게나 “생활비 2년치를 현금으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식의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국민연금이 매달 얼마나 들어오는지, 퇴직연금이나 다른 소득이 있는지, 부부가 함께 연금을 받는지에 따라 필요한 현금 규모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식시장이 크게 떨어졌다고 해서 생활비 때문에 손실 난 자산을 반드시 팔아야 하는 상황을 줄이는 것입니다.
반대로 시장이 좋아 투자자산에서 수익이 많이 발생했다면 일부를 현금화해 생활비 통장을 다시 채우는 방식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은퇴 후에는 무조건 높은 수익률을 추구하기보다 돈이 필요한 시점과 투자 기간을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국민연금·IRP·연금저축, 아무거나 먼저 꺼내면 될까?
또 하나 놓치기 쉬운 것이 연금과 세금입니다. 은퇴할 때 가지고 있는 돈이 모두 일반 예금에 들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금과 주식계좌뿐 아니라 ISA, 연금저축, IRP, 퇴직연금 등에 나누어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단순히 돈이 있는 계좌부터 꺼내 쓰기보다는 국민연금이 언제 시작되는지, 개인연금은 언제 받을 것인지, 연금계좌에서 돈을 받을 때 세금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퇴직 시점과 국민연금 수령 시점 사이에 생기는 소득 공백기를 미리 계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60세에 직장을 그만두고 국민연금을 65세부터 받는다면 5년 동안 생활비를 마련할 자금이 필요합니다. 이 기간에 노후자금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면 국민연금을 받기 시작한 뒤에도 생활비가 부족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국민연금과 개인연금으로 기본적인 생활비가 충당된다면 투자자산을 급하게 처분하지 않아도 됩니다. 결국 은퇴 후 인출 계획은 각각의 통장만 따로 볼 것이 아니라 국민연금·퇴직연금·개인연금·예금·투자자산을 하나의 노후 현금흐름으로 보는 것이 핵심입니다.
노후자금은 모으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노후에는 최소 몇억원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물론 충분한 노후자금을 만드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어렵게 모은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은퇴를 앞두고 있다면 내가 가진 재산이 얼마인지 확인하는 데서 끝내지 말고 몇 가지를 함께 계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매달 필요한 생활비는 얼마인지, 국민연금은 언제부터 얼마를 받는지, 연금이 나오기 전까지 생활비는 어디에서 마련할지, 주식시장이 하락해도 투자자산을 팔지 않고 버틸 수 있는 현금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특히 70대 이후에는 생활비뿐 아니라 의료비나 돌봄비처럼 예상하지 못했던 지출이 커질 가능성도 고려해야 합니다. 은퇴 초기에 여행이나 소비에 너무 많은 돈을 사용하면 정작 돈이 더 필요한 고령기에 부담이 커질 수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를 모았느냐”에서 “이 돈으로 얼마나 오래 생활할 수 있느냐”로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똑같은 1억원이라도 어떻게 나누어 보관하고, 어떤 돈부터 꺼내고, 남은 자산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노후생활의 결과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저도 이번 내용을 보면서 노후 준비는 돈을 모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은퇴 전에는 ‘저축의 기술’이 필요했다면 은퇴 후에는 ‘인출의 기술’이 필요한 셈입니다.
지금 노후자금을 준비하고 있다면 “나는 얼마를 모을 것인가?”와 함께 “은퇴한 뒤 이 돈을 어떤 순서로 꺼내 쓸 것인가?”도 한번 계산해보시기 바랍니다.
※ 이 글은 은퇴자산 관리에 관한 일반적인 정보를 정리한 글입니다. 국민연금 수령액과 세금, 연금계좌의 과세 방식 등은 개인의 연령·소득·가입기간·자산 구성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실제 인출 계획을 세울 때는 본인의 조건을 별도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